[토미뉴]눈

ETC 2014. 12. 30. 13:44
0. 프롤로그

" 그쪽은 내 이름도 모르죠? "

용기내어 너에게 건낸 말이였다. 너는 나의 말에 무심코 대답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렸으나, 그 말이 사실임을 깨닫고 잠시 당혹스러워했다. 평소와 달리 어쩔 줄 모르는 너의 표정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나를 즐겁게 만들었다. 숨기지않고 웃는 나를 보고 너는 나에게 한 방 맞았다는 듯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나의 어깨를 주먹으로 살짝 치더니 내 이름을 물었다. 나는 그 오랜시간 정말로 내 이름 한 글자도 모르고있었다는 사실에 너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심술을 부렸다. 

" 맞춰봐요. 밥 쏜다. "

" 토마스. "

오, 이런, 제기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며 익살스럽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고서야 나는 멍청했을게 분명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알고있었어요? 눈을 크게 뜨며 묻는 나에게 너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모른척했고, 그것이 얄미워 나는 그가 나를 친 것보다 좀 더 쎄게 너를 쳤다. 뭐야, 찍은거에요? 그러자 너는 하. 하는 한숨 소리와 함께 내 미간사이를 손가락으로 치며 모르는게 이상한거 아냐? 라고 말했다. 충분히 모를 수 있는 상황이였으나 뻔뻔한 표정의 너에겐 할 말이 없었다. 언제부터 알았냐고 물었지만 너는 내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않은 채 앞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갈 뿐이였다. 재빠른 걸음으로 그를 따라잡은 내게 그는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 넌 내 이름 아는거 맞지? "

" 민호잖아. 와, 당연히 알지. "

너는 눈썹을 들어올리며 그게 왜 당연해?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다섯달 동안 짝사랑해온 상대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바보일 것이라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집어 삼키느라 그의 소리없는 물음을 외면했다. 그리고 그를 재빨리 지나쳐 앞서나가며 말했다. 중식 콜? 아니, 한식. 그리고 너 은근 반말한다? 존대해라? 칼같이 자르는 그의 말에 나는 웃었다. 그와의 대화가 이리도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했다. 다섯달의 짝사랑이 보답받는 기분이였지만, 나는 그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랬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 없이 소중했다. 


1. 첫 눈

도서관 안 쪽 수많은 책장을 지나서야 들어올 수 있는 자리는 좁고 어두워 책을 읽기에는 그리 마땅치 않은 자리였다. 그러나 때때로 책상 바로 옆의 큰 창 아래로 따가운 햇살이 책상을 물들일 때나, 공기 속을 부유하는 먼지 같은 것들이 햇빛을 받아 하얀 눈 처럼 보일 때면 그것 또한 고즈넉한 기분이 들도록 해서 나는 이 도서관 안쪽의 가장 깊은 구석진 이 자리를 좋아했다. 자주 닦아주지않아 다른 곳보다 쌓여있는 먼지들은 내가 앉을 때면 그렇게 공중을 떠돌면서 내가 책상에 올려둔 책 위에 앉았다. 소복히 쌓이는 눈들처럼. 그만큼 먼지가 쌓일 구석이였고, 이런 먼지 속을 굳이 찾아들어와 책을 읽을 만한 사람이 없었기에 내 앞의 자리는 항상 비어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엔가 네가 내 앞에 앉았을 때를 정확히 기억한다. 그 날은 이른 첫 눈이 내려 구석에 있던 그 작은 공간이 평소보다 더 시린 날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더욱이 누군가 내 앞에 앉을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드르륵 거리는 의자가 끄는 소리에 고개를 든 나는 멍하니 다른 곳을 바라본 채로 의자를 뒤로 뺀 너를 보았다. 너는 내 쪽은 보지도 않은 채 왠 책장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이 아주 까맸다. 보기 드문 동양인이였다. 너와 나의 눈이 마주치고 나는 괜히 움츠러들어서는 다시 고개를 내려 보고 있던 책장을 보는 척하였다. 신경이 쓰였던 것은, 너의 자리는 가끔 찾아오는 나의 자리와 달리 아주 오랜 시간동안 비어있었기 때문에 책상위로 뽀얗게 쌓인 먼지들이 그대로 있을 것이란 사실 이였다. 네가 앉자 그 많은 먼지들은 공중에서 떠돌아야했다. 너는 약간의 알러지가 있는 것인지 코를 훌쩍 되며 짧게 기침을 하고는 들고 온 책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때서야 사람의 시야가 이렇게 넓은 것 이였는지를 조금 알게 되었다. 내 책장을 넘어 보이는 너의 책에 시선이 분산되어 도통 집중을 할 수 가없었다. 사실 그 무엇보다도 신경이 쓰인 것은 네 책의 첫 장이 펼쳐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였다. 나는 내 호기심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보았는데, 나는 분명히 너의 눈을 마주쳤지만 네 눈동자는 텅 비어있었다.

그것이 바로 너는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의 첫 만남이였다.


Posted by 샷_ㅅㅌ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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